세상 사는 이야기

이별연습

treepap 2009. 4. 13. 13:02

                                       이별연습(離別練習)

 

                                                                     1998년 8월 어느날  광주에서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남과 헤어짐은 세상 살아가는 우리들의 일상생활 모습이겠으나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교차하는 아쉬운 이별은 곁에 있을 때는 미처 느끼지

못하나 어느날  갑자기 사랑하는 처자식과 떨어져 생활하는 가장들의 애닯은 심정,

나이 들어 가면서 실감하게 된다.

 

  지난 여름 사령장 한 장으로 어느날 근무처가 바뀐 월급쟁이, 결혼 후 처음으로

처자식과 떨어져 객지아닌 객지생활을 광주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본점에서 사령장을 받아 쥐고 각층 사무실 방에 들러 광주지점으로 간다는 인사를 하고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부임지에 대한 설렘과 전근무지에 대한 석별의 감상 그리고,

괜한 근심과 두려움, 불편함등 온갖 상념에 사로 잡혀 보았다.

  그래도 광주지점은 내가 신입행원 시절 근무지이며 광주에는 나의 모교가 있고

동문들, 옛친구들, 처가 식구들, 여동생들, 그리고, 광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내가 태어난

고향 마을에는 늙으신 부모님이 살아 계신다.

  어쩌면 그간 못다 한 효도를 하라고, 자주 찾아 뵈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이리라.

 

  전임지에 마지막 출근을 하기 전날 밤, 자정이 넘은 심야에 아내와 도란도란 이야기하다

한숨 자고나서 조용히 고3  딸아이의 방문을 열어 보았다.

아직 독서실에서 귀가하지 않았다.

  가만히 책상 의자에 앉아 본다.  몇 가지 학습참고서와 시험지들이 대충 정돈된

책상앞 벽에 붙어 있는 메모판을 무심코 바라본다.

조그만 메모지에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쓰여진 “소녀상”이 눈에 들어 왔다.

 

‘소녀상

순진하지만 바보스럽지 않고

항상 웃지만 천하지 않고

눈은 빛나고 생각을 하며

화려함을 알지만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명랑하지만 수줍어 할 줄도 알며

항상 즐거운 것 같아도 고독을 좋아하며

어둠 속에서나 불빛 속에서나

변치않고 사랑할 줄 아는 소녀‘

 

  ‘녀석, 그래 그런 소녀가 되거라.  혹시 대학입시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좋다.

공부는 못해도 좋으니 늘 건강에 유의하고 훌륭한 인격체로 자라거라.

철부지 어린아이가 공부에 눌려서 여가 선용도 못하고 그토록 열심이던  봉사활동도

제대로 못하는구나.

  아빠 엄마 신혼시절에는 아빠 등에 업혀서 일반 시내버스를 타고  어린이대공원에

가기를 좋아했던 코흘리개가 어느덧 훌쩍 자라서 예비숙녀가 다 되어가는구나.‘

  ‘하나님 아버지, 이 아이의 앞길을 바르게 빛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다음날 아침 시화공단지점 마지막 출근을 위해 승용차에 몸을 실은 나는 서서히 시동을

걸고 2년 가까이 출퇴근하던 낯익은 코스를 달린다.

대림아파트, 5호선 방이역, 가락시장앞, 과천, 인덕원, E-Mart, 제2경인고속도로, 시흥시,

시화공단, 늘 다니던 출근길이 오늘따라 유난히 새로워 보인다.

 

  마지막 출근, 직원들과의 송별인사 내용 요지:

‘저는 부족하지만 신설개점 지점장 발령이후 여러분과 고락을 함께하며 시화공단지점을

개점하였고  여러분이 열심히 일하여 전부문 1등으로 성장한 우리지점, 참으로

여러분은 위대하고  자랑스럽습니다.

떠나더라도 우리는 같은 직장, 참 좋은 인연으로 만난 사이, 여러분 한분 한분은

산에 핀 한 떨기 들국화, 백합, 산수유 아니면 싱그런 상록수 같이 좋은 향기품은

그러한 사람.....

앞 날에 구조조정의 회오리 바람이 몰아치고 혹은 세월이 흘러 직장을 떠나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이곳 일터에서  만남의 시간들은 참으로 의미깊고 서로 아끼고 사랑했던

소중한 시간으로 기억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부족한 이사람과 함께 근무하면서 혹시 느꼈을지도 모르는 서운함이나 언짢은 점이

있었다면 모두 지우시고 좋은 기억만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참으로 열심히 일하고 성실한 직원들,  내인생의  진실한 친구들이 아닌가?

직원들의 뜻을 담았다며 나에게 건내진 쇼핑백 속에는 예쁜 포장지에 싸여진

종이상자 하나가 들어 있었다.

김포공항 로비에 배웅 나온 직원 몇명과 작별 인사를 하고 광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광주 도착, 부임인사. 새로 만난 직원들 몇명과 저녁식사 후에 숙소에 돌아와 여장을 풀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선물 포장지를 뜯어 보니 새하얀 와이셔츠 그리고 안개꽃 무늬가

아로 새겨진  은회색 넥타이가 있어,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어 보았다.

건성으로 거울을 보아도 나에게 너무 잘 어울린다.

 

  쇼핑백과 포장지를 치우려는데, 자그마한 노오란 봉투와

그 안에 들어 있는 황장미가 그려진 조그만 엽서가 들어 있다.

가만히 꺼내어 숨죽이며 읽어 본다.

 

‘지점장님께:

항상 저희들과 함께 하셨으면

하는 바람이었는데.....

짜증날 때 늘 기분을 좋게 해 주셨던

웃음소리를 못 듣게 되어 슬퍼집니다.

어디서나 항상 존경받는 분이라

생각하니 저희들 마음도 자랑스럽습니다.

광주에 혼자 계시면서 음식이나

집안일 모르실 때 전화주시면 친절히

알려 드릴께요.

꼬옥 전화 주세요.

항상 건강하시고요.

또 뵙기를 기도합니다.

 

1998년 8월   직원일동‘

 

  나를 이만큼 생각해 준 직원들이라니, 진실로 고맙다.

나의 웃음소리가 조금 컸던 건 사실이나 이 못난 나를 존경했던 귀한 사람들,

가슴이 아려오고 콧날이 시큰해졌다.

 

  광주 화정동 현대아파트 숙소에서 나 혼자만의 첫날 밤은 밤새 전전반측하다가

심신의 피곤함에 지쳐 어느 사이에 스르르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세상에 태어나서 부모님 슬하를 떠나는 출가, 학교, 직장, 친구, 연인과의 헤어짐등

이별은 평소 연습할 겨를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자식들이 모두 성장하고 출가하여 이역만리 타국으로 이민가고

혼자 남은 어느 할머니의 애절한 사연의 편지를 소개하던 비슷한 처지의 여성 진행자가

“이별은 남은 자의 몫”이고 “떠나는 자 보다 남는 자의 가슴이 더 아프다”는 푸념을

하며 슬픈 감정에 복받쳐서 울먹이면서 진행을 못하자 다음 편지 주인공의 사연은 남자

진행자가 소개하며 낭독하던 방송을 들은 적이 있다.

바로 나 자신도 부모님 슬하를 떠나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 뵙지 못하고

매달 월급날 송금하고 있는 용돈이나마 넉넉하게 보내지 못하는 불효자가 아닌가

하는 자책감에 사로 잡혀 본다.

 

  그런데, 아마도 학교인생, 직장인생, 사회인생.... 살아가면서,

일생에서 가장 큰 이별은 이 세상과의 이별이 아닌가 싶다.

죽음은 아무도 피할 수 없고 너무 두렵기에 나약한 인간들이 종교를 만들었고

절대자인 신에게 의지하려는 게 아닐까?

 

  윤동주 님이 ‘서시’ 중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고 갈파한 것처럼  아름다운 이별을 위하여,

어느 목회자(牧會者)의 말씀처럼  ‘오늘이 나의 남은 삶의 첫날이다.’,

‘오늘이 남은 인생의 시작이다.’라는  긍정적인 자세로 날마다 열심히 일하면서

바르게 산다면,  가정과 직장에서 또 사회에서 이 어두운 IMF 환난도, 그 어떠한

어려움도 능히 이겨내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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